일하는 엄마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들에게 패션은 어떤 의미일까? 엄마들의 영감을 깨워주는 스티커(Stickher)의 안성현 대표에게 물었다.
불나방처럼 일하다 마흔에 아이를 낳고, 새로운 일에 적극적인 피봇을 하다. 힙한 엄마를 위한 콘텐츠 플랫폼 스티커를 운영하는 안성현입니다.
일하는 엄마 그리고 패션. 원고 청탁서를 받고 좀 어렵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세 카테고리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일과 엄마, 엄마와 패션, 패션과 일. 둘씩 짝을 지으면 쉽게 풀리는 화두인데, 세 단어를 엮으니 어려운 시험지를 앞에 둔 것처럼 멍해졌다. 차분히 다시 생각해보았지만 `이거 네가 정말 잘 쓸 수 있는 거 맞아?` 스스로 반문하게 될 뿐이었다.
난 엄마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와 산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패션과 친하다(고 볼 수 있다). 패션지 편집장 출신이기 때문이다. 남성 패션지 <아레나>와 여성 패션지 <그라치아>를 창간했다. 24살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했다. 25년 넘게 잡지 만드는 일로 월급을 받았고, 지금은 스티커(stickher)라는 회사를 운영한다. 스티커는 힙한 엄마들의 소비문화 콘텐츠 플랫폼이다. 나이는 50을 갓 넘겼다(고 해두자). 이렇게 쓰고 보니 `일하는 엄마, 그리고 패션`이란 청탁서가 `나에게 꽤 핏(fit)되는 거네?` 싶다. 나 말고 이 글을 또 누가 쓸 수 있을까. 열대야에 잠 설치는 아들 이부자리를 두 번이나 갈아주고 이 새벽에 나는 뻔뻔한 자신감을 한 스푼 머금고 자판을 두드린다.
엄마의 새벽은 길고 알차다. 이렇게 외고를 쓰기도 하고 다음 날의 업무를 준비하기도 한다. 자기 전엔 냉장고 속을 매의 눈으로 스캔하고 아침(꽤 간단한 등교 밥상) 메뉴를 결정한다. 일을 다 마치고서야 미소를 지으며 두 손 곱게 모으고 잠자리에 든다.
스스로 꽤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십여 년 전 받아든 엄마라는 미션은 부지런, 근면, 성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 가득했다. 시간을 다루는 타임스톤을 심장에 박고 싶은 절체절명의 순간들이 참으로 많았으니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 하나의 우주를 가꾸는 일이라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룰 수도 없고 내일 일을 미리 당겨 해치워 버릴 수도 없다. 그저 빈틈없이 정해진 미션을 하루하루 꼬박 해내야 한다. 그러니 시간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모든 일정이 정확한 루틴 안에 짜여진다. 내가 특별히 계획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다 보니 자연스레 체득한 생존술이다.
이른 아침, 아이 등교를 챙기고 출근 준비를 하는 시간을 쪼개 가벼운 운동을 한다. 업무는 세련되게(?) 10 to 6. 일은 밀도가 중요하니 런치는 주로 우아하게(?) 노트북 앞에서 샐러드로 해결한다. 귀가 후엔 가족과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패밀리 업무(이게 은근히 많다). 드디어 맞이한 야밤과 새벽에 문화 충전을 하거나 지금처럼 일과 관련된 나머지 숙제를 한다. 이런 루틴은 아이의 스케줄에 따라 주, 월, 시즌(주로 방학을 기준으로 한다) 별로 조금씩 변동이 생긴다.
아이를 낳고 얼마간은 시간이 널뛴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리드미컬하게 춤추듯 시간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다. 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거 아닐까 늘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이런 생활의 리듬을 찾는데는 효율적인 업무 환경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일에 쓰는 `절대 시간`을 줄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자 했다. 말하자면 커리어 피봇을 시도한 것이다. 우선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하는 업무 환경이 중요했다. 그래야 어디서나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코로나로 등교를 못하던 시절에 오프라인 업무가 필요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동시에 콘텐츠 큐레이션을 바탕으로 하는 나의 전문 분야이고, 현재 내가 가장 관심 있는 문화와 사람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생활과 업무의 시너지를 바랐고, 일에 투자하는 절대 시간이 줄어들 거라 기대했다. 그 모든 걸 충족하는 것이 엄마(그러니까 나를 위한)라는 분야였다. 스티커를 만들게 된 동기다.
스티커 운영은 근 몇 년간 내 최고의 관심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어서 일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신나게 한다. 매일 아침 인스타그램을 통해 엄마들에게 문화 힐링 알람을 보내고, 일하는 엄마들을 응원하는 캠페인과 지원사업을 계획하고, 엄마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연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여성, 그중에서도 엄마를 위한 플랫폼 스티커(sticker가 아니라 stick`her`다)를 운영하면서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수많은 시스터즈들을 만나는 중이다. 그녀들은 힙한 동시에 소비 주도권을 가진 `MZ 세대`인데 시간을 관리하는 능력이 놀랍다. `엄마가 행복해야 우주가 행복하다`는 스티커의 모토를 피부처럼 입고 태어난 사람들 같다.
그런 우리에게 패션은 한마디로 에너지드링크다. 유행이라고 모든 걸 시도하진 않지만 유행을 반영한 좋은 물건을 고른다. 아이 물건도 마찬가지다. 좋은 소비를 하고 구매한 물건을 잘 관리하는 걸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엄마다. 아이가 배울 수 있도록 작은 선택에도 신중을 기한다. 옷은 매일의 나를 대변한다. 좋은 옷을 입을 때 느끼는 행복이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소재, 핏 등을 고려해 입으면 에너지가 솟는 옷을 고른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스타일링 한다. 거울 앞에서 수많은 옷을 꺼내 돌려 입어볼 시간이 없는 우리니까. TPO를 따져 옷차림을 계획해 둔다.
패션지를 만들면서 행사장 옷차림에 익숙해져서인지, 오바마나 마크주커버그처럼 스타일링 시간을 줄이기 위해 옷차림을 결정해두던 버릇 때문인지, 엄마가 된 후 나는 훨씬 계획적인 사람이 되었다. 주말에 일주일간 입을 옷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팬츠를 구매했다. 앞으로 한 달간 운영될 스티커 팝업스토어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 캔디 컬러로 꾸며진 성수동 공간의 호스트답게 컬러를 입고 싶었다. 발렌시아가풍 핫핑크, 보테가풍 초록 팬츠를 샀으니 소장하고 있는 발렌티노 레드, 로브로브 형광 연두 팬츠를 더하면 근 한 달 잘 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스티커 로고를 응용한 컬러 도트 네일로 행사 패션을 완성할 계획이다.
남들이 눈치챌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50대 일하는 엄마의 패션엔 다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