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인물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유심히 보면, 그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더 잘 알게 됩니다. 영화는 미쟝센의 예술이고, 옷은 연출가에게 가장 매력적인 도구니까요. 영화와 옷을 사랑하는 세 사람과 각각 가장 인상적이었던 ‘올해의 영화 속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듄>을 아이맥스로 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영화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웅장함을 과시하거나 불필요한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걷어낸 화면 구성이 대단히 모던했다. 사막, 돌, 모래바람으로 뒤덮인 얼씨(Earthy)한 색감이 영화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스 짐머의 평온하고 세련된 사운드 트랙에 휩싸여 아이맥스 스크린을 꽉 채운 <듄>의 우아한 영상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황홀했을까. 이 가운데 테크놀러지에 중점을 두지 않는 친근한 의상이 오히려 굉장히 패셔너블하게 느껴졌다.

영화 속 모든 의상은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미래지향적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링이 훌륭한 이유의 7할 정도가 `티모시 샬라메`인 건 분명하다. 그는 패션계가 주목하는 가장 핫한 셀러브리티임에도 본인 의상을 직접 스타일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모든 컬렉션 의상을 마치 자기 옷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티모시 샬라메의 타고난 감각은 영화 속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정복을 입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깃 세운 롱코트에 가죽 롱글로브까지 갖추고 걷는 모습이 정말이지 압권이다. 잠옷으로 등장한 말갛고 단단한 린넨 소재의 튜닉 셔츠 또한 기억에 남는데, 모든 배우가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티모시에게선 특유의 느슨한 멋이 느껴진다. 그의 `절친`이기도 한 하이더 아커만의 컬렉션을 보는 듯하다. 이 영화는 먼 미래인 10191년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미래의 테크놀러지가 볼거리는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고대 문명으로 회귀한 듯한데 이유는 <듄>의 세계관 때문이다.

10191년 미래로 가는 과정에서 AI컴퓨터가 인간의 영역을 넘보자, 인간은 AI와 컴퓨터를 모두 폐기하고 최소한의 기계만을 남기게 된다. 이런 배경 덕에 영화 속 모든 물건과 의상에서 장인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각각의 배우에게 완벽하게 피팅된 정복도 그렇지만 레이디 제시카의 노란색 드레스는 특히 영화가 품고 있는 장인 정신을 뚜렷하게 환기한다. 머리와 어깨, 팔을 두른 베일의 섬세한 크리스털 장식과 하늘하늘한 실크 드레스는 실제 몇 달의 수작업을 통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사막 횡단에 꼭 필요했던 프레멘의 스틸슈트는 영화 의상의 하이라이트다.

간혹 어떤 컬렉션을 보면서 이런 의상이 등장하는 SF영화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보통 컨셉이 뚜렷한 구찌나 발렌시아가를 통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듄>의 의상 디자이너인 재클린 웨스트와 밥 모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싶다. 스틸슈트를 보는 순간 2020F/W 발렌시아가 컬렉션의 바이크 재킷과 팬츠, 모터사이클 부츠가 떠올랐다. 그래 이런 것! 초대형 SF와 발렌시아가. 딱 내가 상상하던 장면이었다. 실제로 디자이너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스파냐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그리스 로마 신화, 사막 유목민인 베두인 그리고 발렌시아가 등에서 의상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내가 스틸슈트를 보며 떠올렸던 바이크 룩이 정말 그들에게 영감을 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투박하면서도 슬림한 실루엣, 구조적인 짜임새는 분명 발렌시아가의 것이다. 스틸슈트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작동하고 인체가 배출하는 모든 수분을 음용 가능한 물로 여과하는 기능을 갖춘 필수 생존 키트다. 슈트의 기능을 리얼하게 구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모든 의상을 각 배우의 몸에 맞춰 제작했다고 한다. 이미 <듄>은 2022 아카데미 의상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내가 보기엔 무조건 수상하는 게 맞다.

가상의 도시 프랑스 앙뉘에서 발행되는 미국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 이를 만드는 편집부와 저널리스트들에 관한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는 감독 웨스 앤더슨이 일찍이 사로잡힌 매거진 《뉴요커》에 바치는 헌사다. 실제 《뉴요커》 편집부의 사무실 풍경을 재현하였으며 영화 속 인물들 또한 《뉴요커》의 직원들과 유명 저널리스트를 모델로 구상했다고 한다. 더불어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스크린 속에 손을 넣어 꺼내고 싶을 만큼 개성 강한 소품들과 멋진 스타일을 자랑하는 캐릭터의 미장센이 그 자체로 훌륭하다.

웨스 앤더슨의 단골 배우 빌 머레이가 연기한 프렌치 디스패치의 편집장 아서 하위처 주니어는 《뉴요커》의 초대 창간인이자 편집장인 해럴드 로스를 참고한 인물이다. 밝은 레몬색 셔츠 위에 실크 재질의 갈색 베스트를 입고 세 가지 컬러가 교차하는 스트라이프 타이를 맨 그의 옷차림은 경쾌함과 엄격함이 공존하는 편집장의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 같다. 아서 하위처 주니어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알며, 동시에 탁월한 필자를 알아보는 안목까지 갖추고 있다. 그는 좋은 글이라면 단 한 줄도 자르지 않고 지면에 싣는다.

오웬 윌슨이 연기한 여행 저널리스트 사제락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도시 곳곳을 누빈다. 비비드한 녹색 바지 밑단을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노란 양말 속에 넣고 옥스퍼드 스타일의 브로그를 신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언제나 베레모를 눌러쓰고 등장하는 그는 영화 제목에 어울리는 프렌치 시크 그 자체다. 모든 인물이 저마다의 멋을 자랑하는 <프렌치 디스패치>는 누군가에게 스타일을 제안하는 룩북 같은 영화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컬러풀한 소품과 의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서 일관된 특징을 찾자면 유니폼(혹은 유니폼의 성격을 띈 소품)이 상당히 이색적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로얄 테넌바움>의 트레이닝복,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의 선원복과 주황색 비니, <다즐링 주식회사>의 루이비통 클래식 트렁크, <문라이즈 킹덤>의 스카우트복,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호텔리어복과 군복 그리고 죄수복이 그랬다. 개개인의 스타일이 선명한 캐릭터들 곁에 비슷한 차림의 무리가 눈에 띄게 모여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 교도관 제복, 죄수복, 경찰복이 그런 식으로 등장한다. 개인이라는 점이 모여 이룬 점묘화 같은 세계와 나란히 몰개성의 세계가 단색화로 놓여 있다. 웨스 앤더슨이 그리는 세계란 이처럼 끝내 마주하는 세계다. 대립하거나 충돌할 수도 있지만 동전의 양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 놓여 어우러지고 맞물리는 콜라주의 세계 말이다.

이 영화는 오스카 의상상 트로피를 두 번이나 거머쥔 의상 감독 밀레나 카노네로와 웨스 앤더슨이 네 번째 합을 맞춘 영화다. “훌륭한 감독은 작품을 위한 연구에 매진하는데 웨스 앤더슨도 마찬가지였다.”라고 밀레나 카노네로는 말한다. 웨스 앤더슨이 추구하는 영화 속 옷은 캐릭터에 시대의 취향과 공기를 입히는 궁극의 미장센인 것이다.

영화관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기생충>이다. 코로나 이후 최신 개봉작에 대한 관심이 매우 줄었고, 최근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옛 영화 혹은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의 명장면만 가끔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영화에 대한 애정까지 식은 것은 아니다. 출연 배우의 이름을 일일이 검색하는 수고를 하면서도 일본 영화는 그때그때 챙겨본다. 재미가 있든 없든 일단 틀어놓고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생활 소음에 귀 기울인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 때 나는 소리, 편의점 자동문이 열릴 때 울리는 소리. 사소한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일본 어느 거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가 스타일리스트가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패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일본 스트리트 패션 잡지 《FRUiTS》를 통해 우라하라(하라주쿠 뒷골목 패션), 시부카지(시부야 캐주얼), 갸루, 빈티지 등의 패션을 익혔다. 이대 앞과 명동에 위치해있던 ‘슈퍼마켓’이라는 의류 매장에서는 늘 J-POP이 흘러나왔고, 그 음악을 들으며 말도 안 되는 옷을 사 입곤 했다.

넷플릭스를 통해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연애 소설과 제목이 같기에 선택했다. 2020년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40대 남자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오르며 지나온 사랑을 다시 한번씩 겪게 되는, 어쩌면 뻔하다고 할만한 로맨스 영화다.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주인공들의 차림이 몹시 평범한 영화이지만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풍경과 물건이 등장하여 소개하게 되었다. 영화는 계속 과거로 향한다. 과거로 흐르고 흘러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은 자기 삶을 바꿔놓은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 만남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시부야의 타워 레코드 앞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마주친다.

오버 사이즈의 옥스퍼드 노티카 셔츠, 잔스포츠 백팩을 맨,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소년이 바로 주인공이다. 히피 스타일의 스커트와 알록달록한 헤어핀으로 유행과 상관없이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한 소녀가 그의 첫사랑. 두 사람의 룩은 영락없이 그 시대의 젊은이를 대변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주인공의 현재 모습과 비교하면 확실히 촌스럽고 어수룩하지만 어린 시절의 패션은 그때 그의 정신을 대변한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영화 속 1990년대 아이템이 과거의 일본을 추억할만한 것인 동시에 30년이 흐른 지금의 서울과 도쿄 거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오버 사이즈의 빈티지 폴로 셔츠에 잔스포츠 백팩을 짧게 맨 젊은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1990년대 일본 패션을 이야기하려면 당시 최고의 패셔니스타였던 기무라 타쿠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드라마 <롱 베케이션>에서 선보였던 베이프의 카모플라쥬 재킷이라던가 알파 인더스트리의 MA-1 재킷, 리바이스 501은 지금도 스타일링에 자주 활용되는 아이템이다. 주인공을 포함해 영화의 인물들이 모두 패션 피플은 아니지만, 1990년대의 일본 분위기를 충분히 그려냈다는 점에서 최고의 패션 영화로 꼽고 싶다. 언젠가 다시 시부야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된다면 후미진 골목에 숨어 있는 빈티지 샵에서 빈티지 샵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는 낡은 티셔츠를 한 장을 사고 싶다.

Image Source: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재팬 공식 유튜브 Illustrator: 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