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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언제나 가장 먼 곳을 꿈꿔왔다. 지구의 끝, 안타티카. 세찬 눈보라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진 남극은 인간의 도전과 탐험 정신이 응축된 상징적인 곳이다.
코오롱스포츠의 프리미엄 다운 ‘안타티카’는 남극 극지연구소 대원들의 연구를 돕기 위해 2012년 최초 필드 테스트를 거쳐 탄생했다. 그 이후 10여 년간 끊임없는 기술적 진화를 거듭하며 탁월함의 새로운 척도를 추구하고 있다. 안타티카가 단순한 겨울 의류를 넘어 인간이 개척해나가는 새로운 세상의 메타포인 까닭이다. 안타티카에 담긴 모험 정신과 헤리티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경험하는 완전히 다른 세상. 이 세 키워드를 열쇠로 세 인물의 일상에 문을 두드려보았다.
모험 정신과 집요함
- 포토그래퍼 임재현
행사장이 아닌 조용한 카페에서 만나니 신선하네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웃음). 포토그래퍼 임재현입니다. 스트릿 포토그래퍼로 사진을 시작해 지금은 브랜드들과 함께 패션위크나 행사 현장의 장면들을 담는 일을 합니다.
어떤 계기로 포토그래퍼 활동을 하게 됐어요?
스물다섯 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어요. 제 인생 처음으로 해외를 가본 거였죠. 별천지 같더라고요. 타국의 낯선 풍경에, 저마다 개성 있게 옷을 입은 외국인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꼭 제가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똑딱이 카메라로 그 모습을 한두 장씩 담아 개인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근데 한국에 계시는 분들이 그 사진들을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댓글도 많이 달리고요(웃음). 그렇게 점점 사진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돈도 모아서 조금 더 좋은 카메라도 사게 됐고요.
사진을 전공한 게 아니었군요?
네, 사진은 취미였어요. 실은 취미라고 하기도 민망하죠. 친구들을 만나면 추억으로 몇 장 찍어서 남기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카메라 세팅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되는지도 몰랐어요. 다만 사진을 찍는 게 너무 재밌어서 일을 쉬는 날엔 무작정 길로 나와 셔터를 눌렀죠. 뭐라도 하나 얻으려면 일단 현장에 나가야 했어요. 몸으로 부딪히고, 거기서 만나는 분들에게 물어가며 배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스트릿 패션이라는 영역을 알게 되고, 남현범, 구영준 같은 스트릿 패션 포토그래퍼들을 동경하게 됐어요. 호주에서 3년간 아르바이트와 사진 작업을 병행하며 꿈을 키웠죠. ‘세계 4대 패션위크를 가야겠다’고요(웃음).
그 꿈, 바로 이루었나요?
네. 머뭇거리면 안 될 것 같아 호주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모두 탈탈 털어 곧장 뉴욕으로 갔죠. 물론 그래도 부족했지만(웃음). 처음 간 곳이 뉴욕 패션위크였는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제 눈앞을 걸어 다니니까 신기하고 또 신이 나더라고요. 일단 돈은 벌어야 했기에 패션쇼장 주위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일이 끝나면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돈 버는 시간 외엔 미친 듯이 사진만 찍었던 것 같아요. 제가 움직이는 만큼 그들을 제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참 고된 일상인데,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네요. 그 이후로 런던, 파리, 밀라노에서도 똑같았어요.
이제는 패션위크 뿐만 아니라 가장 핫한 곳엔 늘 제이림이 있어요. 오늘날과 같은 유명한 포토그래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꾸준한 노력과 몰입이 아닐까요? 저는 정말 사진에 미쳐있었거든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로수길, 압구정에 나가 셔터를 눌렀어요. 스트릿 촬영은 변수가 많아서 플랜 B, 플랜 C를 가지고 있어야 해서,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대응하는 감각을 계속 유지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루에 수천 장, 수만 장을 찍고 집에 돌아와 제 작업물들을 닥치는대로 보냈어요. 매체든 브랜드든 보낼 수 있는 모든 곳에요. 홍보를 위해 인스타그램도 일찍 시작했고, 제가 찍은 사진들을 꾸준히 올렸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브랜드 담당자분들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웃음). 좋아하는 일에 집요하게 파고든 덕분에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과 함께 쌓인 헤리티지
- 언커먼하우스 정영은 대표
쇼룸이 참 예쁘네요.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정영은입니다. 코리아 빈티지를 꿈꾸며 아버지와 딸이 함께 만든 원목 가구를 선보이는 ‘언커먼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언커먼하우스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가구업을 하셨어요. 1981년부터 40여 년간 ‘에벤에셀’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며 목재 가구를 만드셨죠. 제 경우엔 은행에서 오랜 시간 근무했지만, 가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목재 디자인과 친숙하기도 하고 관심도 많았고요. 그러다 몇 해 전, 새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 비록 아파트지만 저만의 색을 담은 ‘언커먼하우스’를 만들고 싶어 아버지에게 가구 제작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의 모습을 점차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면서 본격적으로 가구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되었죠. 아버지라는 든든한 산이 계셨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언커먼하우스의 가구는 유니크함이 느껴지면서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후기가 많은데요. 어떤 과정을 거쳐 가구를 만들고 있나요?
제가 디자인을 하면 아버지의 경험과 노하우가 더해져 제작으로 이어집니다. 실제 만들어진 가구는 저희 집에 옮겨져 짧게는 두 달, 길게는 반년 정도 테스트 기간을 거치게 돼요. 어느 곳이든 잘 어울리는지, 질리지는 않는지, 사용감이 더해졌을 땐 어떤지 보는 과정이죠. 브랜드 SNS에 올려 반응을 살피기도 하고요. 그래서 언커먼하우스는 신제품을 자주 출시하지 않아요. 느리지만 단단하게 우리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갑니다.
아버지의 감각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조각으로 일을 처음 시작하셨거든요. 아버지가 가구 브랜드를 운영하실 때도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하실 정도로 디자인의 완성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당시 업계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죠. 아버지의 공예적인 감각이 가구의 조형미와 균형미를 끌어올려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가구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커먼하우스의 헤리티지 제품들은 ‘대물림’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키워드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남편의 아이디어였어요. 사내 커플이던 남편은 제가 언커먼하우스에 도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지원군이었죠. 모든 게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시대에 아버지와 딸이 업을 대물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면서요. 정성으로 만들어진 가구가 고객들의 삶 속에서 각자의 추억을 덧입어가며 오래오래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브랜드 런칭 초반엔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다며 구매하는 젊은 고객들이 많았는데, 사용해보니 부모님께 선물하고 싶다며 다시 오시는 분들도 많고, 반대로 결혼하는 자녀에게 선물하고 싶어 찾아오는 중년의 고객들도 계세요. ‘대물림’이라는 가치가 브랜드의 큰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아버지의 에벤에셀부터 딸의 언커먼하우스까지, 지금까지 지켜왔고 앞으로도 함께 쌓아가고 싶은 헤리티지는 무엇인가요?
믿고 살 수 있는 제품력이죠. 언커먼하우스의 가구 하나하나 40년간 가구를 만들어온 아버지의 장인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어요. 소량 생산일지언정 만든 사람의 손맛이 느껴지는 가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철학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고요. 그 뚝심과 진심을 지켜나가다 보면, 어느새 코리아 빈티지의 중심에 언커먼하우스가 자리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
- 인플루언서 정오희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두 돌 지난 귀여운 딸을 키우고 있는 정오희라고 합니다. SNS에 일상을 공유하며, 좋아하는 감도의 브랜드와 제품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원래 직장인이셨다고요?
네, 맞아요. 이전엔 직장인이었어요. 뷰티 브랜드 론칭도 했었고, 뷰티 크리에이터들과 함께 협업하는 업무들을 담당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패션, 뷰티, F&B 등 트렌디한 브랜드를 찾아보고, 잘 꾸며진 공간들을 방문해서 사진 찍는 걸 즐겼는데요. 다만 회사에 소속된 직장인 신분에, 크리에이터들을 서포트해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이다 보니 제 개인 SNS를 적극적으로 하기가 조심스럽더라고요.
본격적인 계기가 있다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남편과 결혼해 시너지가 난 것(웃음). 주말마다 함께 멋진 공간을 찾아다니고 SNS에 업로드했어요. 그즈음부터 팔로워분들이 조금씩 늘었던 것 같아요. 또 아이를 갖고 휴직을 하면서 개인 시간이 많아졌고, 관심 있는 브랜드들의 광고 콘텐츠를 하나둘 만들게 됐는데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인플루언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인플루언서분들이 워낙 많으셔서 제 스스로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기가 민망하긴 하지만요(웃음).
새로운 일을 하게 된 지금은 이전과 무엇이 다른가요?
전엔 제가 카메라 렌즈 뒤에 있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앞에 서는 사람이 되어보니까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구나 싶어요(웃음). 심지어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들은 대부분 혼자서 일하잖아요. 콘텐츠 기획부터 제작까지 완성도 있게 만들어낸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저와 함께 작업했던 크리에이터분들이 새삼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실제로 콘텐츠 제작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니, 스스로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게 됨과 동시에 나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 또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아이를 통해 만난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요약하자면 대혼돈의 멀티 유니버스가 아닐까 싶은데요(웃음). 하루를 시작하는 일부터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작되니까요. 육아와 일이 경계 없이 혼재되어 있어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 아이가 두 돌이 지나더니 점점 자기주장이 세지더라고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처음으로 엄하게 혼을 내는 일도 있었답니다.
사실 아이를 낳기 전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호불호가 모호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가르칠까를 생각하면서 무엇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가 명확해지더라고요. 그 부분이 육아를 하면서 가장 달라진 제 모습이라고 느껴요. 그런 제 모습이 저 역시 좋고요.
2025년, 오희님이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요?
콘텐츠를 만들어 SNS로 소개하는 일이 즐겁지만, 안정적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정말 잘할 수 있고,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게 2025년의 목표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넓은 시야와 깊이를 지닌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제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선물해준 아이에게도, 더 멋지게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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