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공터에서 열리는 벼룩시장, 먼지 쌓인 어느 중고 가구 가게에 쪼그려앉아 세계 곳곳에서 숨어든 빈티지 물건을 만나는 빈티지 애호가를 상상해본다.
읽고 묻고 구경하는 게 직업입니다. 2022년에는 책을 쓰며 뉴스레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박찬용 프리랜스 에디터
그는 낡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덩치는 상의 사이즈 115정도, 얼굴의 반을 차지한 수염은 그의 코트처럼 지저분하고 두꺼웠다. 그는 맨해튼의 공터에서 열리는 어수선한 벼룩시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옛날 시계들을 팔고 있었다. 시계 또한 낡아 그의 코트나 수염처럼 지저분해 보였다. 그는 벼룩시장에 앉아있는 걸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울의 맨해튼은 무척 축축하고 추웠으니까. 러시아 단편소설처럼 왠지 우울해 보이는 그 풍경 속에 이 시계가 있었다. 2018년 크리스마스 며칠 전, 뉴욕 출장 중의 일이다.
시계는 훌륭한 출장 기념품이 될 거였다. 로고에 적혀 있는 `르쿨트르`는 예거 르쿨트르의 그것이다. 예거 르쿨트르는 1950년대 짧은 기간 르쿨트르라는 이름으로 북미 시장용 시계를 출시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뉴욕 벼룩시장에서 이 시계를 만난 건 말이 되는 일이었다. 꽤 낡았지만 시계는 드레스 시계의 덕목을 다 갖추고 있었다. 얇은 두께와 얇은 시침과 분침, 고전적인 시계에 쓰이는 여섯 시 방향 초침, 18k 골드 케이스.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게 맞나`하는 의심이 드는 걸 빼면 아주 좋은 시계였다. 물건을 살피고 가격을 물었다. 벼룩시장에서 판다기엔 조금 비쌌지만 진품이라면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노! 이미 좋은 가격이야.” 러시아풍 우울을 몸에 감고 있던 시계 아저씨도 이 물건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들고 말을 이었다. 아주 좋은 시계다, 이거 도금 아니고 금이다…… 이런 말들. 그러나 나도 세계의 벼룩시장에서 온갖 바가지를 쓰며 단련된 몸이었다. 상황도 나에게 유리했다. 벼룩시장은 아침에 열었지만 이미 오후였고, 그곳에서 그 시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10%쯤 깎아 시계를 샀다.
사면서 물었다. 왜 이렇게 좋은 시계를 싸게 파는지.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은 시계를 알리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장사꾼의 번지르르한 말이라 해도, 이런 말이라면 기분 좋게 속을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와 수리를 맡겼다. 오래된 기계식 시계는 한번은 분해해서 오버홀을, 즉 무브먼트의 굳은 윤활유를 닦아내고 새로 조립을 해야 한다. 나는 무브먼트 오버홀만 부탁하고 다이얼의 얼룩은 남겼다. 얼룩도 시계가 거쳐온 시간의 일부라는 생각에서였다. 수리가 끝나 물건을 받으러 가자 수리소 사장님이 조립 전의 무브먼트를 보여주었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러시아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코비드-19 전에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나는 일정이 허락하는 한 반드시 그 도시의 중고품 가게나 벼룩시장을 찾았다. 먼지 쌓인 중고품 가게에 20분만 있어도 출장의 부담과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사진 속 물건들도 모두 그렇게 샀다. 목이 접히는 조명은 제네바의 중고 가구 가게에서 찾았다. 출장을 다니며 물건을 사 왔을 때 만족도가 높은 건 주로 20세기 후반 선진국 생산품이었다. 주전자든 옷이든 가격 대비 만듦새와 디자인이 훌륭했다. 너무 크면 가져올 수 없으니 다만 부피가 문제였다. 이 조명은 작게 접혀서 좋다고 사 왔다.
그러다보니 미련이 늘었다. 이 그릇은 함부르크에서 사 온 빈테링 저그다. 보통 앤틱 그릇과 다르게 장식 없는 20세기 후반풍이라 마음에 들었다. 원래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이사 준비를 하다가 손잡이를 깨뜨렸다.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상당히 낙심했다. 저걸 사겠다고 1~2유로를 깎아가며 흥정을 하고, 연고도 없는 함부르크에서 뽁뽁이를 구하러 돌아다니고, 호텔 직원에게 종이 상자를 부탁하고, 문 닫기 직전의 우체국에서 무서운 표정의 직원에게 사정하여 한국으로 그릇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조마조마하며 상자를 열어 멀쩡한 저그를 확인하곤 기뻐하던 게 생각났다.
저그는 버리지 못했다. 용도를 바꿨다. 꽃병으로 쓰던 걸 이제는 향로로 쓴다. 커피 가루를 모래처럼 부어두고 향을 꽂아 불을 붙인다. 가끔 그릇과 타들어가는 향을 오래 바라본다. 나의 한심함에 대해, 그와 상관없이 내 눈에 그저 예쁜 물건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쇼핑을 남에게 권할 수는 없다. 특히 효율 왕국인 지금의 한국에서. 다만 나는 시간이 날 때면 어딘가의 벼룩시장이나 중고 매장에 가 있다. `내가 또 왜 이러나` 한숨을 쉬며 쪼그려앉아 손에 먼지를 묻혀가며 물건을 뒤적인다. 나는 그래야 하는 사람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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