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골목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
시계 담당으로 스위스를 오가던 박찬용 에디터가 종로구의 시계공을 찾아가 그들의 삶을 여쭈었습니다.
읽고 묻고 구경하는 게 직업입니다. 2022년에는 책을 쓰며 뉴스레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박찬용 프리랜스 에디터
용문사 변승희
선반 전문
종로 5가 두산그룹 발상지 길 건너에 상가 건물이 하나 있다. 겉에서 보면 무엇을 파는지 알기 힘든 큰 특징 없는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된 시계상과 보석상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최대 규모의 가장 오래된 시계 상가인 세운스퀘어다. 시계방들을 지나 2층으로는 엔지니어 작업실들이 이어진다. 공책만한 간판에 단순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그곳 엔지니어들의 경력은 수십 년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본관동 라이프관 2층 223호. 용문사 대표 변승희가 있는 곳이다.
변승희의 업무 공간은 1인용 책상만한 선반 작업대다. 선반은 금속을 회전시켜 작은 부품으로 갈아내는 도구다. 손목시계의 부품은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게 많은데 숙련된 기계공이 선반을 사용하면 지름 1mm가 채 안 되는 톱니바퀴를 전부 손으로 깎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세운스퀘어의 수많은 전문 기능공 중에서 정밀 선반 작업이 가능한 사람은 두 명 정도. 그중 하나가 변승희다. 그는 그 기술로 작업대 앞에서 40년을 보내며 수많은 시계를 고쳤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자기 능력을 부풀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변승희는 ‘1호선 전철을 팔 때부터‘ 세운상가 인근에서 시계 수리를 하다 예지동 재개발과 함께 세운스퀘어로 이동했다. 그가 그의 책상만한 세계 앞에서 작은 부품을 깎는 동안 서울에는 8개의 지하철 노선이 더 생겼다. 청계천이 덮였다가 복개되었고, 시계는 쿼츠와 디지털을 거쳐 스마트에 이르렀다. 변승희는 여전히 아주 작은 부품을 깎고 있다.
광일사 이병근
시계 수리 전문
세운스퀘어 2층에는 시계 관련 전문가 집단이 다양하게 모여 있다. 용문사에서 몇 걸음 떨어진 227호는 광일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광일사 대표 이병근 역시 시계 수리 경력 50년 이상의 전문가다. 그의 명함에는 ‘명품시계수리‘라는 글과 함께 롤렉스, 카르티에, 오메가와 피아제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한국 사람들이 명품으로 알던 시계 브랜드가 이 넷이 전부이던 때가 불과 십수 년 전이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시계의 세계도 아주 빠르게 변해왔다. 이병근은 예지동에서 일했다. 그러나 예지동의 재개발 소식과 함께 다른 숙련 기능공들처럼 길 건너 인의동의 세운스퀘어로 건너왔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처럼 시계 수리 기술자들이 자기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도 우연인 경우가 많다. 이병근 역시 아는 형님들의 소개로 이 일에 들어섰다고 했다. 그는 잠깐 다른 동네에서 시계방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몇 가지 일이 겹쳐 종로로 돌아왔고 이제는 수리를 계속한다. 그의 쇼케이스에는 그을린 손목시계가 몇 개 있다. 무엇인지 물었더니 `예전에 하던 가게에 불이 났는데 그때 남아 있던 시계를 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불이 나도, 마음 같지 않은 일에도 굴하지 않고 삶은 매일 이어진다.
그나저나 종로의 깊숙한 곳에 책상 하나를 두고 앉아 있는 이병근에게 도대체 일이 어떻게 들어올까. 마침 그는 카르티에 산토스 무브먼트 수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5년 전에 나한테 맡겼던 시계예요. 이제 나한테 또 맡기러 온 거야." SNS를 비롯한 첨단 마케팅보다 강한 마케팅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입소문일 것이며 입소문의 근원은 결국 실력이다. 그는 자신이 찍었던 도장 ‘2017‘을 지우고 ‘2022‘를 새겼다. 앞으로도 5년은 멀쩡할 것이다.
정미사 이재원
다이얼 전문
시계 수리업계는 분업화, 전문화가 대단히 잘 이루어져있다. 세운스퀘어 2층에 수리공들이 많다면 3층 바로 위에 위치한 5층은 아주 다른 분야의 자리다. 그곳에는 다이아몬드 가공에 특화된 업체, 유리를 깎는 업체 등이 보완이 필요한 시계를 기다리고 있다.
그 가운데 530호 정미사의 이재원은 다이얼을 전문으로 한다.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전문가가 있다. 그 역시 다이얼 수리와 재생, 커스터마이즈 전문가로 40년 안팎의 경력을 쌓았다.
다이얼은 손목시계의 인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품이다. 말 그대로 시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다이얼은 소재,채색 방식, 마무리 방식에 따라 바탕 처리 방식이 다르다. 프린트를 하거나 별도의 부품을 붙이는 등 마감 처리 방식도 다양하다. 나만의 시계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도안을 맡기고 다이얼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새기기도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는 가수 산다라박이 시계 로고 안에 자신의 캐릭터를 그려 직접 커스텀 했다는 시계 사진을 보여주었다.
‘예지동‘은 시계를 수리하는 하나의 거대한 클러스터다. 다이얼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해야 한다면 다이아몬드 전문 업체에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온다. 이재원 역시 시계 수리라는 큰 생태계의 일부이므로 다른 업체로부터 일을 맡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예지동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은 사라졌지만 예지동 인근의 기술자 클러스터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는 "곧 재개발된다더니 12년이 지났어."라며 웃었다.
M워치 이태주
시계 수리, 오버홀 전문
세운스퀘어 정도의 대규모 상가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고, 사람을 통해 세대를 잇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장인들과 같이 40년 가까이 종로를 지킨 토박이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세대의 시계 장인들이 그들 곁에 자리잡기도 한다. 롤렉스를 ‘로렉스‘로 발음하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제 IWC나 오데마 피게 등을 통해 시계를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세운스퀘어의 장인 정신을 계승한다. 본관 건너편 테크노관 117호에 자리한 M워치 이태주 대표가 그런 경우다.
그 역시 의뢰가 들어오는 시계라면 가리지 않고 수리하지만 요즘 많이 들어오는 일은 기계식 시계의 오버홀이다. 오버홀은 기계식 시계의 엔진인 무브먼트의 전체 분해소지 후 재조립을 말한다. 기계식 시계는 기계이기 때문에 곳곳에 각기 다른 종류의 윤활유가 들어가고, 그 윤활유는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굳거나 닳는다. 자동차의 엔진오일을 교환하거나 엔진 플러싱을 하듯 기계식 시계에도 비슷한 점검이 필요하다. 이태주는 좋은 재료와 기계를 사용하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에 오버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태주의 M워치는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게 시작되었다. 그는 디자이너로 일하다 기계식 시계의 매력에 빠져 과감히 전직했다. 보통의 예지동 장인들이 시계에 빠져든 것과 다른 경우지만 그가 삶의 방향을 바꾼지도 벌써20여 년이 흘렀다. 장인은 나이가 든다. 이태주와 같은 사람들이 경력을 쌓는다. 경력이 쌓인 장인들은 제자를 키운다. 이렇게 시계 골목이 가진 무형의 노하우가 강물처럼 시간을 넘어 흘러간다. 아파트 단지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꼬불꼬불한 골목 과 거기 늘어선 상가를 지키는 장인들은 이제 없을지 몰라도, 장인들이 이루는 무형의 클러스터는 여전히 살아있다. 시계를 좋아하거나 수리가 필요하다면 세운스퀘어에 한번 쯤 가보는 것도 좋겠다. 수줍은 인사를 건넨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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