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나 브랜드가 직접 기획하고 만드는 소규모 독립 출판물.
매거진(magazine)의 'zine'에서 온 말로, 정해진 형식 없이 만든 이의 관심사와 취향을 그대로 담는다.
글 없이, 사진만으로 말하는 책
Plastic Product Zine 02: Fridge
플라스틱프로덕트는 옷만 만들지 않는다.
흥미롭다고 여긴 대상 하나를 골라, 그 대상을 기록한 사진만으로
한 권의 책을 엮는다. PLASTICPRODUCT ZINE이다.
매 호의 규칙은 단순하다.
'플라스틱과 닮은 감각'을 지닌 대상 하나, 약 1,000장의 사진, 그리고 NO INFORMATION.
2022년 은색 자동차만을 모은 01 SILVER CAR에 이어,
두 번째로 고른 대상은 냉장고다.
누구의 집에나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열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는 물건.
스티커와 마그넷으로 뒤덮인 냉장고, 아무것도 붙지 않은 냉장고,
음식이 가득 찬 냉장고, 생수 한 병만 덩그러니 놓인 냉장고.
900여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냉장고는 끝없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 질문이 생긴다. 냉장고란 대체 무엇일까.
WHY ZINE
브랜드를 설명하지 않고 전하는 방법
플라스틱프로덕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서민철은 한 인터뷰에서,
브랜드 이름에 담긴 생각이 말로는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고민에서
ZINE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룩북이나 영상보다 더 입체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체를 찾다 종이에 닿았고,
브랜드를 직접 해설하는 책 대신, 잡지보다 단순한 구조로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진의 형식을 택했다.
기준이 하나 더 있었다. 플라스틱프로덕트를 모르는 사람이 펼쳐도
그 자체로 한 권의 출판물로 성립할 것.
그렇게 쌓인 진이 다섯 권, 열 권이 되면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익숙한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
거기서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서민철 (Mincheol Seo), PLASTICPRODUCT Creative Director
via HYPEBEAST Japan, 2026
읽기 전에,
먼저 무게가 느껴지는 책
NO INFORMATION
928페이지, 120×180mm.
손바닥만 한 판형 안에 얇은 종이가 빽빽하게 쌓여,
책이라기보다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적힌 글자라고는 시각처럼 보이는 숫자와 'NO INFORMATION'이라는 문장뿐.
제목이 들어가야 할 책등에도 냉장고 사진이 자리한다.
사진 곁의 숫자는 사진이 찍힌 시각으로 읽힌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늦은 밤 야식을 찾으며,
시원한 물 한 잔을 꺼내며 냉장고 문을 열던 순간들.
냉장고와 시간이 나란히 놓이면서,
사진의 나열은 누구나의 일상 장면으로 바뀐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듯 꾸밈없는 사진도 의도된 선택이다.
정교하게 다듬지 않은 가벼움. 그 가벼움이 플라스틱의 감각과 닮아 있다.
각자의 언어로 쓴 서평
냉장고 진은 일본과 영국을 오가는 서점,
디자이너, 출판인에게 닿았다.
01.
Yukihito Kono · IACK
PLASTIC PRODUCT ZINE은 오늘날 진이라는 매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꽤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을, 그 흥미를 그대로 간직한 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어쩌면 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즐거움과 실용성이야말로, 오늘날 사람들이 다시 진에 끌리는 새로운 이유인지도 모른다.
02.
Sumire Yoshida · Visual Communication Designer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아티스트 Martino Gamper의 「100 Chairs in 100 Days」가 떠오른다.
이 ZINE 역시 단순히 냉장고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서로 다른 냉장고를 이렇게 엄청난 양으로 모아 보여줌으로써, 대상에 대해 질문할 기회를 만들어낸다.
만약 이 ZINE이 단 10장의 이미지로만 이루어졌다면, 아마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900페이지에 이르는 볼륨이 있기에 비로소 일종의 깨달음과도 같은 영역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발견해준 PLASTICPRODUCT, 고맙습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만나요. 그럼.
03.
Sako · Tsumujikaze Sha
우연히 내게 날아든 이 '두꺼운 냉장고 ZINE'은,
이해할 수 없음 안에 존재하는 '이해할 수 있음',
의미 없어 보이는 것 안에 존재하는 '의미',
그 두 가지를 모두 품은 유쾌함을 다시 발견하게 해주었다.
역시 '의미가 없다', '모르겠다'는 것은 풍요롭다.
가라, 가라. 이대로 계속.
PLASTICPRODUCT!
일본에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더, 다르게 보기
은색 자동차, 냉장고,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60초를 기다리게 하는 시계.
플라스틱프로덕트가 만드는 것들은 늘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무엇이 보일까.
정답을 내놓기보다 익숙한 시선에 작은 틈과 여백을 남기는 것.
900여 장의 냉장고를 넘기고 책을 덮은 뒤,
집에 돌아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면
이 진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LOOK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