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민 끝에 공들여 값비싼 제품을 고르더라도 결국 나에게 가장 좋은 물건은 무엇일까? 를 되묻게 된다. 어떤 물건을 사서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구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더 중요한, 빈티지 물건들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다.
읽고 묻고 구경하는 게 직업입니다. 2022년에는 책을 쓰며 뉴스레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박찬용 프리랜스 에디터
빈티지 옷의 사소한 사연들
영화 속 터미네이터는 어느 날 갑자기 전라의 상태로 인간 사회에 도착한다. 딱 그 반대의 인물이 나라고 해도 좋겠다.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옷장에 셔츠가 가득하다. 어릴 때 산 것, 싸서 산 것, 지나가다 산 것, 마음먹고 산 것, 무슨 일이 있어 급하게 산 것…… 그렇게 옷장을 차지한 것 중 낡은 셔츠가 꽤 있다. “빈티지의 사생활” 마지막 회로 내 오래된 셔츠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이 셔츠는 몇 년 전 도쿄 시모키타자와에서 샀다. 시모키타자와에는 출장 중 촬영을 위해 갔다.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옛 번화가의 뒷골목 느낌이 나는 동네. 좁은 골목마다 어딘가 느슨한 느낌으로 운영되는 가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런 곳에는 나름의 개성이 있는 옷 가게가 꼭 있다. 마침 한 곳이 눈에 띄어 들어가보았다.

가게는 폭 좁은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건물 2층에 있었다. 벽면 간판과 입간판도 이래서야 눈에 띄겠나 싶을 만큼 작았다. 들어가보니 옷도 드문드문 걸려 있었다. 악성 재고로 옛날에 출시되었으나 오늘날까지 새것으로 남아있는 데드 스톡을 판매한다고 했다. 그런 옷들 사이에 이 셔츠가 걸려 있었다.

마침 찾고 있던 것이었다. 약 네 사이즈쯤 커서 티셔츠 위에 아우터처럼 걸칠 수 있는 얇은 셔츠가 있었으면 했다. 당시에 몸에 잘 맞는 셔츠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터미네이터의 팔도 들어갈 만한 암홀이 넓은 셔츠를 찾기가 어려웠다. 90년대 셔츠는 대개 암홀이 넓다. 은은히 반짝이는 자개단추를 썼고, 실루엣도 곡물 자루처럼 펑퍼짐하게 디자인되었다. 이걸 요즘도 잘 입는다. 한여름에도 가방에 구겨넣어 다니다가 냉방이 너무 센 곳에서 여름 이불처럼 걸친다.
옛날 셔츠를 보다보니 결국 빈티지 숍을 찾게 되었다. 어릴 때처럼 헌 섬유 냄새와 습기 냄새와 세재 냄새가 뒤섞인 시장에서 파래김 한 뭉치를 세듯 한 장 한 장 옷을 들쳐가며 고를 에너지가 이젠 없다. 인터넷 덕에 그럴 이유가 더 없어졌다. “폴로 셔츠 XXL”와 같은 검색어로 각종 중고 장터를 클릭하고 다니는 게 한때의 소소한 여가였다. 이 셔츠는 그러던 어느 날 5천원엔가 샀다. 언젠가는 사보고 싶던 셔츠였다. “너무 후줄근하고 너무 크다” 싶은 셔츠를 찾고 있었다. 매번 선물 세트 프레임처럼 몸에 딱 맞는 옷만 입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 셔츠엔 단점이 하나 있다. 바로 냄새. 옛날 옷을 입거나 한 벌의 옷을 자주 입어본 사람이라면 알 텐데 섬유가 오래된 것일수록 냄새가 잘 밴다. 한낮에 땀을 흘리고 저녁에 훠궈라도 먹게 되면 대중교통을 타고 귀가하기 민망할 정도다. 옷을 달래가며 입는다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시간이 끼얹어진 옷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후줄근함 때문이다. 오래된 섬유는 추레한 만큼 불편함 없이 몸에 감긴다.

헌옷 냄새는 청바지에서 풍길 때 조금 더 곤란하다. 빈티지 청바지에선 “꼭 이걸 샀어야 했나” 싶은 냄새가 날 때가 있다. 뜨거운 물로 빨래하고 섬유유연제를 써도 덥고 습한 날에 한 번 입으면 전부 소용없는 일이 된다. 섬유 깊은 곳에 숨죽이고 있었던 듯 예의 그 냄새가 다시 올라온다. 몇 번의 빨래로 판매자에게도 나에게도 냄새의 책임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엔 그냥 입고 다닌다.
이 청바지는 한 인터넷 빈티지 숍의 폐업 세일 중에 샀다. 95%쯤 할인을 받아 천값도 안 되는 가격에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명 브랜드도 아니었다. 일본이 지나칠 정도로 청바지의 온갖 디테일에 집착하던 때 만들어진 일본산 청바지였다. 상품을 받아보고서야 파격적인 세일의 이유를 알았다. 허리는 너무 컸고 손이 자주 닿는 곳과 옷의 끝단이 전부 닳아 해져 실밥이 일어났다. 이런 옷은 기장 수선을 하면 잘라낸 곳만 새것같이 되어버려서 오래된 집에 신품 플라스틱 창틀을 끼운 것처럼 어색해진다. 그러니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다.

의외로 이 청바지에 손이 자주 간다. 우선 허리가 커서 편하다. 더이상 낡을 수 없을 만큼 낡아서 더러워져도 아쉬울 게 없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손을 탄 옷인데도 금방 내 옷같이 자연스러워져서 좋았다. 지금은 한여름이라 옷장에 걸어두었지만 가을이 오면 “사는 건 모를 일이구나” 생각하며 또 바지를 꺼낼 것이다.
이 모자도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몇 년 전 자동차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프랑스 르망으로 출장 갔을 때 1유로를 주고 샀다. 햇빛을 가려야 하기도 했고 기념품을 사고 싶기도 했는데 몇만 원씩 하는 정품 레이싱 굿즈를 살 마음은 없었다. 오래된 레이싱 책과 스티커를 파는 곳 한쪽에 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수백 개쯤 같은 모자가 구겨진 채 쌓여 있었다.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에겐 스폰서 로고가 덕지덕지 인쇄된 레이스 모자에 로망이 있었다. 모자는 청바지와 마찬가지로 살 때부터 후줄근했고 지금은 완전한 내 물건이 되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물건들은 그리 귀한 것들이 아니다. 구매 루트가 조금 복잡하지만 누구나 시간을 들이면 비싸지 않은 금액에 마음에 드는 걸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물건들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언젠가부터 가장 좋은 물건은 내 물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엔 좋다고 주장하는 물건이 많다. 실제로 좋은 물건도 많다. 공정이 많이 들어가거나 소재가 값비싸서 판매가가 높아진 물건도 많다. 그러나 그건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어떤 물건과 나의 관계는 내가 물건을 산 뒤에야 시작된다.

꼭 값나가는 물건과의 관계만 귀한 게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우정이라고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니듯. 어떤 물건을 사서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떤 마음으로 구해서 어떻게 쓰느냐가 쇼핑과 의생활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귀할 것 없는 물건들과 쌓은, 남들에겐 사소하겠으나 내게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 추억 이야기를 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어떤 물건과 함께든 좋은 추억을 만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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